아이가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 한 지 달 쯤 되었을 때 비로소 집안일 루틴이 잡히기 시작했다.
치우기, 정리하기를 급급하게 해치우던 수준에서 나아가 버리고 단순화하기 단계에 돌입했기 때문이다. 집안일에 들이는 필자의 노고와 시간이 현저히 줄어 운동도 시작하고 나만의 시간을 만들 수 있었다. 그러면서 내가 시간을 보내는 집이라는 공간을 조금 더 내 마음에 들게 정돈하고 싶어졌다.
필자는 깨끗한 식탁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어릴적 필자의 엄마는 식사 후 더러워진 밥상을 행주로 닦으며, 식탁은 주부의 얼굴이라는 말을 나에게 여러번 하셨다. 특별히 필자가 부엌일을 거들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말을 여러번 하셨던 걸 보면 엄마는 당신의 반복된 일상을 나름의 작은 의식으로 생각하며 일정 자부심을 부여하셨던 것 같다. 놀랍게도 이제 그 말은 필자가 식탁을 닦을 때 마다 매번 되뇌이는 기억이 되었다.
오래전에 선물받은 프리츠한센 꽃 병이 있다.
직장생활에 하루하루 근근히 버텨가던 때라 꽃 병을 감히 어찌할 생각을 못하고 창고에 오래오래 모셔두었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꺼내본다. 여전히 여백의 미가 담겨있는 아름다운 화병이다. 마침 주말에 참석한 결혼식에서 받아온 예쁜 꽃다발에서 색깔이 은은하게 예쁜 꽃 몇 송이를 골라 화병에 꽂아보았다. 깔끔하지만 심심했던 식탁이 인스타그램에서 본 듯한 예쁜 사진이 된 듯 했다. 가족들도 좋아했다. 아기도 "꽃이 생겼네!" 하며 환하게 웃었다. 하지만 일 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 꽃은 하나 둘 시들어갔다.
그 때 쯤 운이 좋게 남편에게 기념일 선물과 함께 꽃다발을 받았다.
내가 꽃 병을 식탁에 올려놓으니 알아서 꽃다발을 함께 준비한 모양이다. 잘 되었다. 송이가 크고 봉오리 모양이 통통하고 독특한 것이 물건을 잘 볼 줄 모르는 내가 봐도 바다건너온 비싼 꽃송이 같아보였다. 필자의 식탁은 이전보다 한 층 더 풍성해졌다. 역시나 일 주일이 지나자 그 꽃들도 시들었다. 그렇게 우연한 몇 번의 기회로 꽃병의 꽃이 몇 번 바뀌고 시들고 했다. 그래도 나는 좋았다.
어느날, 화병에 꽃이 시들어가는 것을 본 시어머니는 분홍색 장미 조화 한 다발을 사다주셨다.
조화임에도 한 다발에 3만원이 넘는다며 상당히 좋은 조화라 하셨지만 나는 조화 자체를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싫어하는 쪽에 가까웠다. 더군다나 어머니는 꽃은 풍성한게 좋다며 화병이 기울어져 쓰러질 것 처럼 꽃다발을 한아름 무겁게 꽂아 놓으셨다. 꽃병이 위태로워 보였다. 나는 프리츠한센 꽃 병이 허락하는 단지 몇 송이의 꽃에서 느껴지는 그 여유와 고고함이 좋았는데, 더이상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며칠뒤 나는 꽃 병을 치워버렸다.
한참이 지나 다시 식탁위의 갸날픈 꽃송이가 그리워졌다.
꽃 선물이 그리 자주 들어오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직접 꽃을 사러 꽃가게를 가볼 셈이었다. 다행인지 집 주변에 꽃 가게가 제법 많다. 가장 가깝고 비싸 보이지 않는 집으로 향했다. 하지만 시골 동네 가게라 그런가, 남편이 사온 것 같은 예쁜 꽃송이는 보이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꽃은 많은데 어떤 꽃이 좋은 꽃인지, 누구와 누구가 어울리는지 아무리 봐도 알 수가 없었고, 심지어 꽃 가게 주인장도 안목이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가격도 그렇게 저렴하지도 않았다. 빈손으로 가게를 나오기가 뭣 해 몇 송이를 골라 계산을 하고 나왔다. 주인장의 상술에 당한 것인지 꽃 다발도 아닌, 예쁘게 포장한 것도 아닌, 그저 그런 꽃 몇 송이를 투명 셀로판지에 싼것 뿐인데 4만원 가량을 지불하였다. 당했다는 생각만 들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차를 타고 백화점으로 가서 실력있는 전문가가 만들어놓은 마음에 드는 꽃다발을 살 걸, 하고 생각했다. 바로 다음 날, 근처에 다른 일이 있어 우연히 꽃 가게 앞을 지나가는데, 폐업했다는 안내문이 큰 글씨로 써 있다. 아마도 내가 마지막 손님이었나 보다. 그래서 어제 계산하는데 주인장이 그렇게 환하게 웃었구나, (호구 한명 잡고 가서!) 폐업하는 마당에 기분은 좋았겠네 생각하니 더이상 그 일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지금 내 식탁 위는 꽃병이 없다.
예쁜 꽃을 알아볼 수 있는 안목이 없어서도, 시어머니의 은근한 자기취향 강요 탓도 아니었다. 아쉽지만 매주 꽃 가격으로 4만원씩 지불할 열정이 없는 내가 가장 문제였다. 아마도 4만원이 400원 쯤으로 체감될 정도로 부자가 된다면 다시 식탁에 꽃병을 올릴지도 모르겠다. 지금으로써는 나에게 꽃은 그저 값비싼 취미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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