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의외로' 취향이 까다로운 편이다.
평소엔 이래도 좋고, 저래도 괜찮다, 당신 원하는 대로 하라고 상대를 편하게 해주는 편이다. 요구가 많지 않고 상대방의 대접에 '다 이유가 있겠지' 하며 이해하려 노력하는 편이며 순간의 감정을 오래 담아두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모습은 타인과의 관계에 한정된다. 온전하게 나의 정신과 취향에 관련해서라면 호불호가 명확하고 그 기준 또한 상당히 깐깐하다. 학창시절을 통틀어 레포트를 직접 쓰지 아니한 적이 없었다. 세상 어느 글을 긁어 복사해와도 내 마음에 들지 않았으니까. 친구의 복붙한 레포트가 필자의 레포트보다 훌륭한 학점을 받을 지언정 필자는 내가 직접 쓴 레포트를 내는 멍청한 짓을 기꺼이 해왔다. 소개팅을 수 없이 했으나 정작 연애까지 이어진 횟수가 적은 것은 상대의 부족함 때문이 아니라 온전히 나의 까다로움 때문이었다. 명품백을 구입할 때도 그랬다. 마음에 들지 않는 가방을 그 돈주고 사느니 차라리 지금의 이 거지같지만 정든 가방을 나는 계속 들겠다는, 남들은 잘 이해하지 못할 행동들을 곧잘 하기도 했다. 드라마도, 음악도, 책도 마찬가지다. 적지 않은 컨텐츠를 접해왔음에도 내 마음에 꼭 드는 것이라면 평생에 몇 개 되지 않는다. 그래서 필자는 오히려 욕심이 없는 것 같다. 그것이 나를 마치 평온한 사람인 것 처럼 보이게 하는 이유인것 같기도 하다. 이것은 필자가 희망 수명의 절반정도를 살아오면서 자연스레 타인과 비교하게되며 알게된 스스로의 특성이다. 그래서 필자는 알고 있다. 어떤 것도, 아마, 내 취향을 만족시키기는, 어렵다.
챗GPT, 네가 내 취향을 맞춰 줄 수 있을까?
그래서 사실 처음에는 챗GPT도 잘 이용하지 않았다. 블로그에 글을 게시할때도 GPT는 흠 잡을 데 없는 완벽한 글을 제안해주지만, 필자는 가끔 문법에 맞지 않고, 지나치게 편협하기도 한 필자의 엉터리 글을 고집하고 있다. 그런데, 나이를 먹고 인생이 복잡해지면서 별 것 하지 않아도 이 시간이라는 놈이 자꾸 부족해진다. 심지어 일을 하고 있지도 않고, 아이는 어린이집을 다니고 있음에도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충분히 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고 느끼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책을 이전만큼 자주 읽지 못하고 있는데 노안이 오기전 바지런하게 읽어두어야 할 텐데 슬슬 걱정이 온다. 책을 읽어도 특히나 요즘은 시간이 다소 아까웠다는 생각이 들 법한 책들이 상당히 많다. 유튜브인지 뭔지, 인스타그램 인지 뭔지 때문인것 같은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출판되고 추천받은 책들이 베스트셀러에 심심찮게 오르는 것을 보면 책으로서의 가치기준이 필자와 상당히 다른 사람들이 다수이고 필자가 시대에 뒤처진 사람인 것이 맞는것만 같다. 그래서, 중요치 않은 책들로 소중한 내 개인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기에 이 방법을 한 번 실험해 보기로 했다.
필자는 지난 4년간 읽은 책들을 '북적북적'이라는 독서앱에 기록 해놓고 있다.
감상을 따로 남기는 짓 따위는 하지 않지만 솔직하게 별점을 매겨두긴 했다. (5점척도로 입력하는 시스템이다.) 인생책이라면 매우 신중하게 5 점을, 시간이 아까웠다는 생각이 아주 조금이라도 들면 1점을 매기는 방식이다. 내가 읽은 책을 기록(저장)해두면, 실제 책의 두께를 반영한 책 아이콘이 화면에 겹겹이 쌓이는데, 나는 그것이 쌓이는 걸 보는 게 좋아서, 단순히 그 앱을 계속 사용해 왔다. 그 리스트를 활용해서 챗 gpt에게 최고의 책을 한 권 추천 받아 읽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gpt가 내 까다로운 취향을 감히 맞춰줄 수 있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그래서 챗 gpt앱을 켜서 대충 물어보았다. '나는 쓸데없는 책을 읽느라 시간 낭비를 하고 싶지 않다. 지난 몇년간 읽은 책 리스트와 짧은 느낌점을 보고 내 독서 취향을 분석해서, 내가 좋아할만한 책을 아주 신중하게 한 권 추천 해 줄 수 있어?' 챗GPT는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그거야 말로 내가 잘하는 일이야! 네 시간을 아낄 수 있게 맞춤 큐레이션 해 줄게'
챗gpt가 저리 자신만만하게 대답하는게 되려 짐짓 불안했다. 일전에 필자는 올웨더투자와 미국주식배당투자를 과거 20년 동안 매월 500만원씩 투자했다고 가정했을 때의 각 수익률과 하락장 대응력을 구체적으로 계산시켰던 적이 있었는데, 챗gpt는 어이없게도 계산 실수를 하는 모습을 보였었기 때문이다. 내가 gpt의 계산이 틀렸음을 깨닫고 이 점을 점잖게 지적해주었더니 gpt는 여러 말을 덧붙이며 미안하다고 재계산을 해주었다. 필자는 그 덧붙인 여러 말들이 변명같이 들려서 조금 짜증이 났다. 아마도 필자는 그저 미안하다고, 요즘 나를 찾는 이들이 많아 잠깐 리소스가 달렸던것 같다고 짧게 사과했다면 오히려 더 괜찮았을 것 같다. 아무튼 의심의 마음을 간직한 채 챗GPT에게 필자의 지난 독서 리스트와 함께, 책마다 몇 단어의 소감을 추가하여아서 공유해 주었다.
필자가 장르 구분없이 읽은 60여권의 책 중에 5점을 득한 책은
'금각사, 오만과 편견, 모순' 단 세 권이었다.
그밖에 부동산/주식, 육아서, 동양철학, 과학, 고전, 연애소설 등 끌리는대로 다양하게 읽은 책이었지만 돌아보니 가장 마음에 들었던 책은 단 저 3권이었다. gpt는 필자의 독서 취향을 '감정적 깊이가 있는 심리적 통찰에 관심이 있으며, 고전 중에서도 감정선이 분명하거나 문체가 뛰어난 작품을 좋아한다고 분석했다. 그 근거로 이방인, 데미안, 채털리 부인 등 무심하거나 건조한 고전엔 낮은 점수를 줬음을 언급한 것이다. 필자는 사실 이 얘길 들었을 때 동의하지 않았다. 필자는 스스로 탄탄한 구성과 스토리가 있는 책을 즐겨 읽는다고 생각했고, 눈물 유발 영화는 절대 보지 않으며, 지리한 연애 드라마는 사실 크게 흥미를 못느껴왔었는데 이런 필자가 감정적인 책을 좋아한다고? 납득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 챗 gpt는 필자에게 '지금의 삶을 지적, 감정적으로 다시 일으켜 세우는 깊이 있는 한 권'이 필요하다며 가즈오 이시구로의 '나를 보내지마' 라는 책을 추천해 주었다. 나는 인생이 무너진 적이 없는데? 아니, 무너졌다 한 들 너에게 얘기하지는 않을 것 같소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답변을 계속 따라가 보기로 했다. 감히 이 책을 읽고 나면 "이걸 왜 이제야 읽었지?" 싶을 정도로 인생책이 될 확률이 높다며 이 책을 추천해주니, 오기가 생겨 안 읽을 수가 없었다. 이 책은 내가 몇 점을 줄 수 있을까?
여름휴가 기간동안 이 책을 챙겨갔다. 그리곤 세 밤 만에 다 읽었다.
필자는 이 책 역시 북적북적앱에 완독 했음을 저장(기록)해두었다. 이 책은 잠시 고민하다 5점을 주었다. 아니 4.5점을 줄 걸 그랬나? 그래도 언젠가 다시 한 번 읽고 싶은, 책을 좋아하는 다른 누군가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몇 안되는 책인것 같아 과감하게 5점을 주었다. (더욱 정확히 얘기하자면 사피엔스와 금각사의 중간쯤 되니까 4.7점이 옳겠다.) 챗gpt가 생각보다 내가 몰랐던 내 취향을 정확하게 꼬집어낸 것이 아무리 생각해도 놀랍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 정주행을 시작했으나 결말이 다가올수록 도저히 볼 수가 없어 시청을 자체 중단한 '미스터 션샤인'과 주인공 공유(한결)의 감정선에 몰입하여 감상한 '커피프린스 1호점' 드라마 또 한 유사한 맥락이긴 하다. 감정의 모호함을 정교하게 표현하고, 낯선 감정을 대하는 방식과 내적 충돌(딜레마)의 과정과결단의 윤리성 같은 부분들이 작품안에서 끈질기게 조명된다.
필자는 GPT에게 또 다른 책을 추천해 달라 요구했다.
GPT는 이번엔 욘 포세의 '아침 그리고 저녁'이라는 책을 추천해주었는데, 이 책은 시작도 전에 좀 쎄하다.서술형태가 독특한 것이... 아마도 완독이 쉽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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